쿰란

성지순례 2014. 12. 21. 17:34

☆☆ 쿰란 ☆☆

 

쿰란 (Qumran, Kumran)

사해 북쪽 해변에서 남서쪽으로 해변을 따라 5㎞쯤 떨어진 곳에 쿰란이란 고대 거주지가 있으며,

이 거주지에서 서쪽으로 3백여m 떨어진 유대광야의 높은 언덕이 막 시작되는 입구절벽에 이상하게 생긴 제 1 동굴이 보인다.

이런 쿰란 동굴은 11개가 바견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됐는데 금세기 인류역사에서 놀랄만한 발견으로 본다.

이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곳에서 쿰란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에세네파사람들이

구약성경과 율법과 예언서를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공동체생활을 했으며. 스스로 진정한 이스라엘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렸다고 한다.

 

 

필사본 성경

유적들

험한 지형의 저 동굴에서 수도생활을...

 

쿰란 동굴 앞에서

☆☆ 쿰란 ☆☆

쿰란 (Qumran, Kumran)

☆ 사해 사본 발견 ☆

1947년 베드윈족의 양치기 소년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다가 언덕 위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소년은 양이 그 속에 있으면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동굴 위까지 가까스로 올라가 돌을 안으로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아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혹시 보물항아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호기심에 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하고,

 친구와 몇 시간의 노력 끝에 겨우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동굴 안은 넓고 평평하게 다듬어저 있었고,

질그릇항아리가 여러개 놓여 있었는데, 그 항아리 안에는 보물은 없고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얇은 양가죽을 꿰매서 이은 두루마리였으며 길이 100cm ~ 800cm에 너비 44cm나 되는 그 두루마리들에는

뭔지 모를 고대 히브리어가 깨알처럼 적혀 있었는데 이 두루마리는 성경 이사야서 등이 적혀있는 구약 필사본이었다.

이 성경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사본이었는데

이 사본은 글씨체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지금 까지의 사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전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었다.

이 필사본이 2천년의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건조한 이 지역의 기후 탓이라고 한다.

사해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약 필사본이며 현재 예루살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1949년에는 요르단 고고학 연구소의 하딩에 의해 쿰란 제1동굴에서 성서, 비성서문서, 외경 등이 추가로 계속 발견되었다.

 그후 52년에는 제2동굴에서 작은 단편들이 발견되었고,

다시 제1동굴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서 제3동굴이 발견되었으며 2백74개의 히브리어 및 아랍어 단편과 2개의 동판 두루마리가 나왔으며,

쿰란 서쪽에서 4개의 동굴이 또 발굴되었으며 에스더를 제외한 성서의 모든 문서와 경문서 주석서 제의문서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이 동굴들은 11개가 발견 되었다.

 

☆ 사해 사본, 사해 문서(死海寫本, 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 ☆

사해 문서(Dead Sea Scrolls) 사해 두루마리는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사해의 북서쪽 해변에 있는 와디 쿰란 주변과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한 900여편의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들을 포함한다.

이들의 연대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00년 이내로 올라가기 때문에 엄청난 종교적, 역사적 학문적 가치가 있다.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 쿰란공동체의 규율집 들로 대부분 문서들이 갈색 양피가죽 위에 쓰여 있고,

일부 문서는 파피루스에도 쓰여 있는데 탄소 계열의 재료로 만들어진 잉크로 새의 깃털촉으로 쓰였다고 한다.

 "구리 두루마리"라 이름 붙인 문서는 종이처럼 얇은 구리판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사해 문서 가운데 80% ~ 85%는 고대 히브리어로 쓰였으며,

사해 문서 히브리어와 원시 탄나이트(미쉬나) 히브리어로 불리는 3개의 히브리어 방언들로도 쓰였고,

일부 문서는 아람어와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사해구약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의 문서는 예루살렘의 지혜의 신전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에세네파 ☆

에세네파는 BC 2세기 요나단 마카베와 그 뒤를 이은 시몬 마카베가 대제사장의 자리를 빼앗고, 교권과 왕권을 겸하게 되자

제사장직 찬탈을 반대하고, 유대교 사회에서 분리되어 나왔으며, 에세네파는 시몬 마카베가 에세네파를 박해하자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을 따라 광야로 도피하였으며 BC 2세기 중반 에세네파의 수도원 공동체(쿰란공동체)가 세워졌는데

시기상으로는 시몬 마카베 재위기간(BC 143~135)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쿰란공동체는 서기 68년 베르파시아누스가 이끌던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그들은 두루마리 구약성서와 율법과 예언서등 문헌들을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며,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문헌들을 항아리에 담아 동굴에 숨겨 놓았다.

유대 지방에 살던 에세네파의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쿰란에서 흩어져 살던 에세네파 신도들은

예루살렘의 사악한 제사장들이 패망하고 참다운 제사장이 나타나 참다운 이스라엘로자신들의 공동체가 설 것이라는 계시를 믿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성서학습, 육체노동,·예배, 기도에 힘썼으며, 구세주의 성찬을 예언적으로 기념한다는 뜻으로 식사는 공동으로 했다고 하며,

그들의 세례식은 회개를 의미하고 “하느님이 택한 백성”이 되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공동체생활을 했으며. 스스로 참 이스라엘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키르베트 쿰란("쿰란 유적지"라는 뜻의 아랍어)☆

1947년 “사해 사본”이 처음 동굴에서 발견되자 계속 된 탐사에서 이 동굴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서 유적지를 발견하고

1951~1956년 동안에 이곳 키르베트 쿰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80㎡ 정도 넓이의 유적지 폐허속에서 발굴한

주 건물은 길이 44m 폭 27m의 직4각형 모양이며 석고가 발라진 큰 돌로 지어진 대규모 건물로서 ,

위층에는 문서실이 있고 북서쪽 모서리에는 2층으로 된 거대한 석조 방어탑이 있으며,

기록실로 추정되는 방에서는 책상, 의자, 말라버린 잉크가 담겨진 잉크 스텐드도 발견되었다고 하며, 

공동 식사 때 사용 된 것으로 추정되는 식당 등도 발굴되었으며 이 방에서는 1,000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건물 주변에는 방앗간, 염색집 ,옹기장이집, 대장간, 제분소, 여러 개의 물 웅덩이와 7개의 저수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서는 약 1,200개의 무덤이 있는 넓은 공동 묘지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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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ny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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