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교회

성지순례 2014. 9. 16. 17:19

 

무덤교회

성묘교회 (聖墓敎會) The Church of Holy Sepulcher,

 

무덤교회

성묘교회 (聖墓敎會)The Church of Holy Sepulcher,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Holy Sepulcher

예수님 무덤 교회, 주님의 무덤교회, 거룩한 무덤

부활기념교회 Church of the Resurrection

 

  ***비아돌로사로 자료를 정리하면서 아쉬움이 있어 무덤교회 부분을 다시 정리해 본다***

실내 촬영이 금지되거나 어려움으로 사진 자료가 부족하다. 실내 촬영 전문용으로 작은 제2카메라를 가저갈 걸 그랬다.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교회는 예루살렘 구시가의 북서지역 즉 예루살렘성 내부의 서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처형을 당해 죽으신 골고다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신 곳으로 전해지는

장소에 세운 교회로 비아돌로로사 10~14포인트가 이곳에 있다

요한 19:41~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하였듯이 가까운 곳에 두 장소가 있어

이 교회는 두 장소를 둘러싸도록 설계되었다.

 

 골고다(Golgotha)는 아랍어이고, 영어로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갈보리(Calvary), 라틴어로는 칼바(Kalva, Calva)로 표시한다고 하며 해골이라는 뜻이다.

즉 골고다 언덕과 갈보리 산은 같은 장소를 말하며 예수님 당시에 이곳은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거의 나무가 없이 큰 바위로 이루어진 해골모양의 언덕으로

황량한 채석장이었으며 유대인의 십자가형이 행하여지던 처형 장소이자 무덤 지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저서 정확한 골고다의 언덕의 위치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현재의 기념 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다와 예수님 무덤이라는 역사적인 신빙성은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63년경에는 로마가 지배하게 되었고, 이때 로마황제의 총애를 받은 헤롯 안티파스(기원전 4~기원후 37)가 왕이었으며,

기원후 33(31년설도 있음)에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시었다. 그 후 44년경에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의 직속령이 된다.

1차 유대 독립항쟁(66-70)이 진압되어 유다는 로마의 속주가 되고 종교의 자유등 유대인의 모든 특권이 박탈당하게 되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117-138)가 즉위하자 제국을 순시하면서 아테네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을 짓게 하였고,

130년에는 예루살렘을 순시하면서 로마인의 도시로 건설하고, 성전 터에는 제우스 신전을 세울 것을 명했다.

이것이 제2차 유다 항쟁(132~135)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2차 유다 항쟁을 진압 한 후 루푸스 총독은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을 바꾸고, 골고다 언덕을 평탄하게 하고

135년에는 로마의 최고 신 제우스와 그의 아내 비너스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옛 성전도 제우스 신과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섬기는 신전으로 개축하여

로마인의 도시로 건설하였다.  2차 유대 항쟁을 이르킨 후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게 되고,

이 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요르단과 시리아 등지로 피신하게 된다.

 

그 약 200년 후 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재위306~337)313년에 기독교의 종교자유를 인정하는 밀라노칙령을 포고하고

박해 시 몰수했던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의 재산을 돌려주게 되면서 예루살렘과 갈리리 호수 주변등 이스라엘 전 지역에 교회가 복구된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황후(St. Helena)324년에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 중에,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 자리가 바로 골고다와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설명을 듣게된다.

AD 135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등 에 로마식의 주피터신전을 세웠고,

예수님의 무덤위에는 비너스 신전을 세운 것이 오히려 하드리안의 표시가 되어,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찾고자 원하는

헬레나 황후의 명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메카리우스(Bishop Mecarius),

편평하게 지형이 변해버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쉽게 찾아내게 되고

신전 지하실에서는 예수님의 못 박히셨던 나무 십자가도 발견하게 된다.

헬레나 황후는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326년에 황제의 명에 의해 그 로마의 신전은 다시 헐리게 되고

골고다와 예수님의 무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발견된 주요 장소를 아울러 그 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대성전의 건설이 시작되어

10년만에 완공하여 335년에 봉헌하고, 이곳을 지구의 중심으로 선포했다.

 

 

4세기에 건설된 이 첫번째 성묘교회는 두개의 건물로,

첫번째 건물은 현재 건물의 모양 상 앞 제대가 위치하는 곳에 해당하는 로툰다 Rotunda이 돔 구조물 안에는 예수의 무덤 유적을 감싸는

이디큘 Aedicule (작은 건물)을 세워 예수님의 무덤을 기념하는 교회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부활교회 Anastasis Rotunda라고 불렸다.

또 다른 건물은 십자가가 섰다고 믿어지는 골고다 언덕 유적과 연결되었던 대성전 Great Basillica으로

순교자 기념교회 Martyrium, 열주 아트리움 Triportico 등으로도 불렸다.

이 첫 성묘교회는 페르시아가 614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파괴되고 불탔으며, 보관되어 있었던 성십자가등을 빼앗기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강성해지자 헤라클레이오스(Ηράκλειος)황제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630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십자가를 재건된 성묘 교회에 반환했다.

 

 이슬람세력이 강성해지자 634년 다마스커스를 점령했고, 637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묘교회는 이슬람세력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초기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타 종교인에게서 추가 세금을 걷는 대신 도시의 기독교 유적지의 파괴와 주거지로의 사용을 금지하여 관대하다는 평가도 얻고

경제적 실익도 얻는 왕권을 위한 정치적 정책을 펴서 성묘교회를 비롯해 이스람이 점령했던 중동 대부분의 교회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순례와 모임에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그동안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1009년 당시의 지배자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성묘교회를 파괴 할 수 없는 부분 외에 모든 것을 파괴한 이 사건으로

기독교 세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이 사건은 훗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두번째 성묘교회는 칼리프 알 하킴의 아들 칼리프 알리 아즈-자히르 Ali az-Zahir와의 1027-28년 동안의

티마 - 비잔틴 간 협상의 결과로 1009년 파괴된 후 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기독교계는 이 협상을 통해 성묘교회 등의 복구 중건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파티마 칼리프 측은 콘스탄티노플에 모스크를 다시 열고 예배하는 것을 회복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에 억류되어 있던 자국 포로 5천명을 귀환시키게 된다.

성묘교회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골고다 언덕에 해당하는 대성전에는 십자가 사건과 관계된 작은 교회를 세우게 되고, 부활교회-로툰다를 중심으로 건물이 회복되었다.

성묘교회는 다섯개의 작은 교회들을 건설하여 십자군 전쟁 까지 유지된다.

또한 성지 예루살렘에 성묘교회와 성묘교회를 본부로 하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좌를 복구하고

강요받아 개종하였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를 철회하고 기독교인으로 돌아오는 일이 이루어 졌고, -하킴에 의해 파괴된 다른 많은 교회들도 복구되었다.

 

 세번째 성묘교회는 1009년 카이로 출신 칼리프 엘 하킴에 의해 성묘교회가 파괴되자

'예루살렘 순례를 방해하고 기독교 성지를 파괴하는 잔악한 이슬람을 몰아내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자'는 운동으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로마카톨릭 교황청의 총동원령에 따라 유럽각지에서 다양한 영주들이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결국에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된다(1099).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영주국가가 세워지고, 이들은  성지의 파괴된 교회들을 복구, 보수, 재건축하게 된다.

두번째 성묘교회를 조사하고 관리하던 예루살렘 왕국과 사람들은 대성전이 위치했던 폐허 지하에서 헬레나가 십자가를 처음 발견한 곳을 믿었다.

십자군은 성묘교회에 대한 조사와 함께 11세기 중반에 복원된, 다섯개의 두번째 성묘교회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반적으로 보수하고 개축하면서,

다섯개의 두번째 성묘교회를 통합된 지금과 같은 형태의 현재의 모습으로 건설하였다

. 현재 볼 수 있는 성묘 교회는 교회의 정문과 예수님 무덤위의 둥근 지붕(Cupola)은 십자군 시대의 것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골고다 언덕을 포함하기 위하여 2층 구조로 건설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성전의 요체가 되었으며

즉 입구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2층에 골고다가 있으며 왼쪽에는 원형광장 한가운데에 그리스도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입구는 2개의 아치형으로 설계되었는데 현재는 하나만 사용되고 하나는 폐쇠되어 있다.

이때부터 예수님 부활교회에서 무덤교회로 명칭이 바뀌어 불리워젔다.

이 교회는 십자군의 본부가 되기도 했고, 정교회의 총대주교좌에서 최초의 라틴 총대주교좌 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1545년 지진으로 인해 종탑을 비롯하여 상당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1717년과 1728년 두 차례에 걸쳐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나

1808년 성묘교회에 화재가 발생하여 로툰다 부분등 많은 부분이 불타게 되었는데, 이때 유럽은 나폴레옹의 전쟁시기라

라틴계 교회는 성전을 보수하기 위한 여력이 없었던 반면그리이스 정교회 측은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오스만 터키의 도움으로

로툰다의 돔이나 이디큘의 외관을 당시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성전을 보수하고 보수한 부분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복원 작업및·개축이 계속되어 1810년에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 후 1834년 지진으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라틴교회와 정교회가 공동으로 성전을 보수하였고,

1927년에도 지진으로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1959년 라틴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합의하여 1961년부터 재건 및 보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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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ny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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